광복 70년 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괴산 청안초등학교 |
"교육으로 국권 되찾자" 학교 설립 위해 지역민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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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학 , 2015-04-16 오전 10:2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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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 1919년 3월 20일 오후 3시30분 청안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하고자 사전 계획과 연락을 긴밀히 하였다. 주도한 사람은 김수백, 이태갑, 박래명, 장성원, 신강면, 함재원 등이다. 이들은 주민동원지구까지 배정하고 동원된 인원과 장보러 온 사함들이 합류하여 총 인원추산 2만여명에 이르렀다.
준비한 태극기 수천매를 갖고 미리 대기중이던 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쌀전에 집결토록 지시하고 오후 2시경 거사는 시작됐다. 괴산 연락원 이모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어서 이태갑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의기 충천한 군중은 일지헤 '대한독립만네'를 계속 높이 부르며 태극기를 휘날리니 온 시장안이 들끓는 함성이 진동하였다.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도자 박홍균 이종규를 청안주재소로 연행해갔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가 '어째서 죄없는 조선인을 너희가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일경은 충주에서 긴급 출동한 수비대와 함께 무차별 발포를 해 군중을 해산시켰다.
일제의 발포로 노도원 등 9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고 복역자 7명이 발생했다. 이처럼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할 큰 업적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청안초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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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괴산 청안초의 '청안교육100년사'에 수록된 일제시대 강점기의 역사다.
교정에 천연기념물 165호인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청안초(교장 신범우)의 역사는 사립 천명학교로 시작된다. 1908년 2월 전 의관 차문선씨가 관아의 서대청에 학교를 열어 청년교육을 실시해오다 재정난으로 한때 문을 닫기도 했으나 민명식 전 군수가 향교의 사택을 수리해 같은해 5월 학생들을 모아 다시 교육을 시작했다.
당시 학교 이름은 중명으로 지었고 1909년 5월 학부 인가를 받았고 이후 1911년 11월 청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당시 학교설립을 위해 지역민들이 1천원을 모금했다.
청안초는 교육구국운동 차원에서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 등 일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교육을 실시해오자 통제하기 시작함에 따라 재정압박을 받아 공립으로 전환했다. 1908년 당시 교장은 민명식으로 전 군수를 지낸분이셨다. 청안초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한국인이 초대 교장을 지냈다.
#일본의 압박
이 당시에는 한국인이 세운 학교들이 민족교육을 실시하자 일본이 사립학교들을 공립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독소조항을 만들고 재정과 교사, 간섭 등의 압박을 가해왔다.
당시 청안초도 개교식을 두 번씩이나 갖는 상황을 맞았다. 9월18일 개교식을 가졌으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국경일인 11월3일(천장절) 개교식을 성대하게 치르기도 했다.
이날 개교식은 국화향기가 그윽하고 하늘에는 수백장의 일장기가 휘날렸고 정오부터는 축하연을 열고 오후 2시30분에는 기념 운동회을 하고 오후 5시에 행사를 마칠 정도였다.
1910년부터 35년간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민족사상 말살을 위한 동화교육과 식민교육을 악랄하게 실시했다. 대표적으로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일본어를 국어과목으로 일본역사를 역사과목으로 하였으며 노동력 착취를 위한 저급한 실업교육을 실시하며 위압적인 교육을 통해 순종하는 국민을 기르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 일본의 우민화와 민족말살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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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일본은 청안초에도 식민토대를 닦기위한 일본어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같은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확충했고 우리민족의 사상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주장하기도 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 과목을 필수과목에서 수의과목으로 변경하고 일본역사를 국사로 변경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모든 교육에 군사교육 노무 교육 등을 시켰고 보통학교를 초등학교로 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중학교 수업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해 전시동원체제를 마련하기도 했다.
일본이 우리국민의 민족성과 양심을 파멸시키기 위해 실시한 사례들은 국어를 조선어에서 일본어로 고치고 학생들에게 '황국식민서사'를 일본어로 암송시켜 일본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짐받게 하기도 했다.
또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관리들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계 봉사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특히 행정기관에 제출하는 진정서 등은 일본어로 작성해야만 접수를 했고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서두르기도 했다.
# 학교목 은행나무
청안초 은행나무는 고려시대 성종(981-997)때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1천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로 지난 1964년 천연기념물 165호로 지정됐다.
청안초를 다녔던 학생들은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졸업사진을 찍을 정도로 지역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범우 교장은 "은행나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청안초 학생들에게는 추억의 장소로 남아있다"며 "100년이 넘는 청안초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와 6.25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 동문들의 회상
황규호(39회)씨는 "코흘리개 나이에 전쟁용 군수물자 연료로 쓴다는 공출 솔뿌리를 캐러 날이 저물도록 동네야산을 누볐던 기억과 광복을 맞은 해 산너머에서 몽둥이 찜을 당한 도둑이 피를 흘린 채 소달구지에 실려 읍내로 온 끔찍한 사건, 늑대가 동네 돼지를 잡아갔다는 일 등이 지금도 머리에 남는다"고 전했다.
41회 졸업생인 김한수(76)씨는 6·25 전쟁이 나던 해 청안초등학교 4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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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어떻게 졸업한지도 모르겠어"
김씨는 그 시절은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표현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당시 교육을 받기도 힘들었던 시절, 김 씨는 고작 11살이었다.
그는 10살까지 집에서 천자문 교육을 받다가 3학년으로 입학했다.
입학한지 1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김씨는 "당시 58명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며 "12학급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청안초 건물은 그때 사용하던 건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인민군을 잡아끌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난다"며 "쉬는 시간 10분 사이에 그 모습을 구경하려고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고 전했다.
김씨는 그 당시가 너무 힘들어 생각하기도 싫다고 얘기했다.
그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든 시기였다"며 "도시락을 챙겨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도시락도 잘 사는 친구들이 싸왔는데 나머지 친구들이 한 숟갈 얻어먹으려고 노력했다"며 "보통 아이들 반찬은 고추장 아니면 김치였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의용경찰대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공비 토벌'을 이유로 군인들을 많이 잡아왔다"며 "부상자들도 당시 청안장터 위에 있던 병원에 많이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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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초 안에 있는 은행나무와 연못은 전설이 있다.
은행나무에 도깨비가 살고 연못에 뱀이 있다는 전설로 현재까지 구전되고 있다.
김씨는 당시에도 이런 전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연못이 굉장히 깊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장난치다 연못에 빠질까 봐 그런 전설이 생긴 것 같다"며 웃었다.
/김병학.강준식기자
이 기획물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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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오후 7:24:46 © 충북일보(http://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광고문의 | 구독신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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